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성격 특징과 평가 및 한계점 다운로드
독립신문
독립신문 창간 당시의 상황
개화세력의
강화를 위하여
인재 필요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에게 귀국 요청
독립신문 창간 당시의 상황
서재필
정부의
적극적 지원
일본의 반대
자금 조달
사옥 마련
유길준과 서재필
협박
독립신문 창간 당시의 상황
최초의 민영지인
독립신문의 창간
독립신문의 창간
1896년 4월 7일 창간
순한글판과 영문판으로 구성
띄어쓰기 실시
사장 겸 주필 ? 서재필
회계 겸 교보원, 국문판 주필 ? 주시경
독립신문의 발전시기 구문
독립신문의 발전
제 1기 : 창간(1896년 4월 7일)
~ 1896년 7월 2일
독립신문이 창간된 다음 독립 협회가 창립될 때까지
주로 국민의 계몽을 다룬 논조
정부에 대하여 매우 협조적
독립신문의 발전
제 2기 : 1896년 7월 4일
~ 1898년 5월 11일
독립협회 창립 이후부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출국할 때까지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 건립운동 지원
독립협회 회원과 국민의 계몽에 주력
독립신문의 발전
제 3기 : 1898년 5월 12일
~ 1898년 12월 30일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주필이 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해산 당할 때까지
독립협회의 대변지 역할
자주민권운동을 지원하고 민중을 참여토록 지도하는 내용
독립신문의 발전
제 4기 : 1899년 1월 1일
~ 1899년 12월 4일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이후부터 독립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윤치호? 아펜젤러? 엠벌리로 주필 변화
내용과 표현방식이 온건해지고 국민의 교육계몽에 주력하게 됨
독립신문의 폐간
정부에서 <독립신문>에 사옥의 반환 요구
독립신문사의 사옥을 4천 원에 매수
매수한 이후 폐간시켜 버림
황성신문
황성신문 창간 당시의 상황
황성신문의 창간
개신 유학자들에 의해 1898년 9월 5일 창간
한문에 익숙한 지식층을 위해 국한문 혼용
묵직한 논설로 인한 남성 독자층의 확보로
<숫신문>이라고도 불림
황성신문의 폐간
총독부는 한일합방을 단행하면서 모든 민족지를 없애기 시작
1910년 8월 28일 강제 폐간당함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의 상황
기존 민족지들의 위축…(생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미리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